나에게 당신만이 소중한 사람 당신이 있어 나는 살았소 버티며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려 고맙다는 말 전하오
나에게 당신만이 소중한 내 사람 당신과 함께 살아가겠소 버티며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려 사랑한단 말 전하오 사랑한단 말 전하오
Lucia (심규선)-고맙습니다(웹툰 '선녀외전' OST)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을 모티브 한 작품으로 날개 옷을 되찾기 위한 21세기 선녀의 피 튀는 복수, 증오, 그리고 사랑 이야기
심규선 (Lucia)의 목소리로 재해석된 '고맙습니다'는 2020년 팝페라 팀 라비던스(RabidAnce)의 데뷔곡으로, 2022년 원곡의 작곡가이자 가수 유해준이 다시 불러 감동과 공감을 다시금 자아낸 바 있는 짙은 여운을 남기는 곡이다.
따뜻한 피아노 연주와 스트링으로 시작해, 한 편의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듯한 심규선 (Lucia)의 목소리로 전해 듣는 '고맙습니다'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가사가 인상적이다. 심규선 특유의 감성과 짙은 호소력이 어우러진 이 곡을 통해 다시 한번 듣는 이에게 감동과 위로, 용기와 희망을 전해보려고 한다.
개인의 존엄과 생명은 더는 존귀하지 않으며 혐오와 혼돈에 싸인 시대는 뒤틀린 분노를 허락하는데
저들의 색이 나와 다르니 처단하겠나이다 신의 이름으로 축복하소서 이 칼을 벽을 세우고 다시 허물고 겨눈 총구 끝에 아이들이 스러져 죽고 다칠 때
우린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리 서로 다름에 편 가름에 증오를 옮기는 이념 우리 옳거나 그름은 과연 옳은가 혹은 그른가
우린 끝없이 묻고 깨워야 하리 짓밟고 난 뒤에 재건하는 전쟁과 참상의 반복 우리 사람의 욕망에 과연 한계나 끝이 있는가
우리 사람의 본성은 과연 선한가 혹은 악한가
Lucia (심규선)-Question
우리의 별은 괜찮을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행성은 앞으로도 수십억 년, 어쩌면 그 이상의 영겁과 같은 시간 동안 계속 존재할 테니까요. 새까만 우주의 외딴곳에서 언제까지고 창백한 푸른빛을 발할 지구의 영속성에, 우리 인류의 존재 유무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겠지요.
소위 ‘지구를 위한’ 다는 식의 슬로건은 전부 ‘우리를 위한’, 혹은 ‘우리 문명의 존속’이나 ‘우리 종의 생존을 위한’으로 바꿔 말해야 할지 모릅니다. 현재 우리 문명의 자연 시스템은 과거부터 행해져 온 여러 인과로 인해 전방위적인 붕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동식물이 먼저 멸종 위기에 처해졌고 그리 오래지 않아 우리에게도 그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쫓겨났다는 것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문제는 내쳐진 뒤 갈 곳이 없다는 것.
인류가 다행성종이 되고 무너진 생태계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두 번째 기회를 갖게 될 가능성은 아직 요원해 보입니다. 우리는 무분별한 개발과 파괴의 열매를 맛보았고, 이제 우리가 획득한 지성으로 우리 종에 내재한 본성을, 그 선과 악의 옳고 그름에 대해 절실히 재고해 보아야만 합니다.
왜 우리는 우리 손으로 탄생시킨 AI에게 우리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어렵게 인식 시켜야만 하는 것일까요? 마치 영혼이 없는 아이와도 같은, 우리 지성의 집약체인 AI에게 우리가 그렇게 해로운 존재로 인식된다는 것은 인류 스스로가 집단 무의식 속에서 우리 자신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 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왜 끝끝내 전쟁과 탄압을 반복해야만 하고 역사의 페이지마다 무의미한 피를 묻혀야 하는 것일까요? 속절없이 탄식하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요? 팬데믹과, 전쟁과, 기후재난이 우리 삶을 (말 그대로) 지배하기 시작하자 불안과, 공포와, 허무주의가 은밀하게 그 뒤를 따라왔습니다.
우리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생각들에 착취되며 걱정과 우울함에 침잠하기 시작합니다. 스스로를 해칠만한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시간들이 길어지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갖가지 매체들로 시선을 돌립니다. FOMO와 강박적인 Doomscrolling이 우리의 생각을 마비 시킵니다. 직접 판단하거나 선택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스크롤을 내릴 수 있게 되고 그로 인해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과각성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지쳐있고 불쾌한 자극에 중독되었습니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컴퓨터의 탄생과 함께, 인류사에서 전례가 없던 기술적 격변 위에서 우리는 전례 없이 위태롭게 서 있습니다.
#HUMANKIND는 우리 인류라고 하는 종, 사람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앨범입니다. 지금의 우리를 이루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왔습니까? 문제는 나의 이해가 너무 얕고 얄팍하여, 쉽게 대답을 내리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차라리 발단이 되어, ‘내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인식으로 가닿게 해주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작가가, 정작 자신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어떤 기적이 일어나야 할까요? 나의 고민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복잡하게 엉켜있는 나 자신을 스스로 해석해 보고자 하였고, 그러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의 관심은 점차 시대적 물음으로 번져갔고 자연스럽게 거슬러 올라 우리의 본성에 대한 의구심에까지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대대로 내려오는 가족의 불행을 자기 대에서 끊겠다고 결심하고, 그걸 실제로 해내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겪었던 폭력과 배고픔, 학대나 무관심이 자기 아래 세대나 주변으로 번지지 않게 막아냈습니다. 그 개인이 하나의 제방이 되어 관계 맺은 모든 사람과 심지어 자신의 삶까지 구해낸 것입니다. 그 숭고한 용기는 그 대에서 끊어지지 않고 다음 세대, 그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져 가겠지요. 우리 인간은 그런 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감내하거나 희생할 줄 알며 다른 이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놀라운 인내와 지혜를 발휘하기도 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홀로 선하거나 강해질 수는 없습니다. 인류는 상황과 필요에 맞게 더 옳은 선택을 관철해왔으며 그것이 우리 종의 번영에 핵심적인 축이 되었다고 보아집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세대에서, 더 이상의 파괴를 끊겠다고 다 함께 선언하고 실행해나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 세대가 다음에 올 인류 전체에 대한 거대한 제방이 되어, 우리 문명에 덮쳐올 붕괴와 재난을 막아낸 첫 세대가 된다면 어떨지 말이에요. 어떤 과학자들은 이대로라면 지금의 우리 세대가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붕괴되고 있는 자연 체계와 더 이상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사회 제도에 대한 반향으로, 우리의 가장 어린 세대들은 자기 포기적인 태도를 그 어느 시대보다 더 눈에 띄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중심 축에 서서, 번영에서 붕괴로 치닫는 이 현실을 비틀거리며 겨우 통과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붙잡아 주어야 해요. 우리가 개인으로 행동할 때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낮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전체로써 하나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나 또한 일개 음악가 일뿐 환경 운동가도 과학자도 아니지만, 이제부터는 목소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것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초를 다투기 때문에요.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에게 묻고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모두 이것에 대해 목소리를 드높일 수 있을 때 변화는 가장 빠르게 번져 갈 것이라고. 우리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퍼져있는 허무와 비관은 우리가 외면하기를 그만둘 때 자연히 사그라져 갈 것이라고 말이에요.
이 음반은 시와 음악을 자기 목소리로 삼은 한 표현가가 조금 더 거대하고 넓은 의미의 중요한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에 관한 실험이기도 합니다. 우려와 자기 의심이 뒤따랐지만, 말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에 끝내 입을 다문다면 자기 목소리를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 나는 보통의 일개 음악가일 뿐이지만, 나의 확장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의 확장과 같은 뜻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나의 표현 세계에는 대중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온 마음으로 음악에 존재를 부딪혀오는 한 사람, 단 한 사람의 경청자만이 존재합니다.
흔히들 예술가에게는 뮤즈가 필요하고, 창작을 지속하려면 그러한 존재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감사하게도 내게는 그 뮤즈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기웃거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뮤즈이자 경청자인 당신이 나를 떠나지 않아 준 덕분이지요. 당신의 실존이야말로 내게는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창작 이유입니다. 우리 공동의 실존이 있었기 때문에 작가적 치기나 이상에 가까운 아집 또한 부려볼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이 노래들이 나의 혼란과 두려움을 식히는데 역할을 했다면 당신에게도 반드시 똑같이 그러할 것입니다. 삶을 온통 점령해버린 무의미 속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찾고자 하는 당신의 분투, 넘어질 걸 알고 있어도 다시 내딛는 그 걸음의 자취들에서 내가 쓰고 부르는데 필요한 의지를 구했습니다. 부디 나의 노래들이 이 격변하는 역사적 경첩의 시대에서 매일 생존하기로 결심하는, 우리의 용기에 부합할 만한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심찮게 과학적 반전이 일어나는 시대입니다. 오래전부터 당연한 것으로 믿어온 사실조차 새롭게 의심하는 시대. 이제 우리가 진정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가진 지성은 아주 기초적인 것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인류세의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 위대한 세계에서, 끝없는 우주에서. 나는 무엇이고 또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이제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우리 사람의 본성은 선과 악 어느 쪽에 더욱 근거합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내일에 대한 너의 예감들을 믿으렴 지금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하니까 사나운 불안과 갇힌 마음에 살아도 봄이 오고 또 오고 반드시 오듯이
조금 우울, 하지만 죽고 싶지는 않다고 우리들의 봄은 늘 그렇게 여러 겹의 색 봄은 마치, 향기로운 폭력처럼 내게 와 그렇게 울고도 또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하니까
아아아아아 아아 아
감미로운 가락을 내게 부추기네 우리를 속이고 약 올리는 사월의 들뜬 밤 조율할 수도 없이 헝클어진 생의 화음 이 순환 속에서
조금 부끄럽지만 숨고 싶지는 않다고 우리들의 봄은 늘 그렇게 미묘한 죄책감 봄은 마치 향기로운 폭력처럼 내게 와 그렇게 울고도 또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하니까
조금 우울, 하지만 죽고 싶지는 않다고 우리들의 봄은 늘 그렇게 여러 겹의 색깔 봄은 마치, 향기로운 폭력처럼 내게 와 그렇게 울고도 또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드니까
아아아아아 아아 아
Lucia (심규선)-Periwinkle Blue (페리윙클 블루) 동화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이 경쾌한 이름은 어떤 색깔의 이름이에요. 언뜻 생소하지만 의외로 흔히 보아왔던 색깔이라는 사실에 호기심을 느꼈지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하늘빛에서, 보도블록 사이에 피어난 이름 모를 꽃잎에서, 들여다보아야만 발견할 수 있게 한 겹 숨겨져있는 봄의 신호들에서, 무심결에 언뜻 드러나곤 하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말이에요.
사전은 이 색깔을 푸른빛에 자주색이 섞인 색이라고 설명하는데, 나는 쓰고 부르는 사람답게 이 색을 제멋대로 사람에 투영해 보았습니다. 우울을 상징하는 블루에 신비로움을 뜻하는 퍼플이 겹친 이 색깔이, 어쩌면 현재의 우리들의 모습과도 매우 닮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돌이켜보면 우리들의 봄도 늘 그렇게 여러 겹의 색깔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소란스레 피어나는 와중에, 그 개화를 반기면서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우울이 꽤 오래 우리 안에 있었을지도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내일을 매도罵倒한 적이 있었는지요. 당신은 아무리 답답한 현재에 갇혀 있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늘 내일에 대한 신비로운 예감들을 믿어왔습니다.
근래에 어떤 설문조사 결과를 보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우울합니까?]라는 질문에는 [아니오], [죽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에는 [네],라고 대답한다고 하더군요.그것은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답이었어요.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모두 똑같은 동시대의 우울과 싸우고 있습니다. 때문에 서로를 이해할 수도 있지요. 그런 면에서 나도 당신을 이해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이해받고 있듯이.
나는 우리가 우울할 때, 조금 우울하다고 드러내서 말할 수 있었으면 해요. 긴 여정인 우리의 삶에서 그런 때란 언제든지 오고 또 언제였나 싶게 사라집니다. 자신을 감추어야 할 정도로 누구에게도 걱정을 끼치고 싶어 하지 않는, 당신의 깊은 다정함이 당신 스스로에게도 향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내가 체감한 당신의 온기는 사월의 햇살만큼이나 온화했으니까요.
'죽어도 상관없다'거나 '죽으면 죽는 거지' 라는 말이 흔해졌어요. 당장 내 안에서도 그런 말이 들려올 때가 있거든요. 이것은 시대가 우리에게 심은 말이지 절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의식적으로, 어떻게든 생의 만발하는 한때를 누리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해요. '조금 우울하지만, 죽고 싶지는 않다'고. 네. 고작 그렇게 되뇌는 것만으로도 삶의 색채와 균형은 변화합니다. 영하의 기온으로 곤두박질치다가 다시 고온으로 치솟는, 초봄의 날씨가 아무리 변덕스럽다 한들 꽃이 못 피더이까. 삶은 언제나 우울보다 강합니다.
계절은 순환되지만 늘 같은 봄이 아니듯, 사람 또한 헝클어짐과 피어남을 반복하는 생의 화음 속에 있음을 기억해 주세요.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던 우리 안의 짙푸른 우울도, 내일에 대한 낙관을 끌어안을 때 많은 것들과 섞여들며 새로운 빛깔을 자아냅니다.
누군가 당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을 만큼, 미묘한 스스로의 색채를 이제 저 바깥에 드러내세요. 당신은 파랑도 아니고 보라도 아니며, 동시에 파랑이기도 하고 보라이기도 하다고 말하면서요. 우리 안에 있는 색깔이라면 모두 아낌없이 꺼내 펼쳐서 매일의 불안을 새롭게 덧칠합시다. 사람들은 그 색깔을 보고 생경해하면서도, 동시에 봄꽃 번지듯 서서히 물들어 갈 거예요. 그렇게 울고도 또 새로운 꿈을 꾸고, 새로운 기대로 내면의 우울까지 온통 물들여 버립시다. 거스를 수 없는 삶의 생명력으로. 긴 겨울이 아무리 막아보려 한들, 봄이 오고 또 오고 반드시 오듯이.